바나듐 없이도 흐름전지가 된다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VRFB)는 가장 성숙한 흐름전지 기술이지만, 바나듐이라는 원소 자체가 발목을 잡는다. 매장이 특정 지역에 편중돼 있고 가격 변동이 크다. 철은 정반대다. 지구상에서 가장 풍부한 금속 중 하나이고 가격도 안정적이다. 문제는 철 이온이 보통 두 가지 산화상태(Fe(II)/Fe(III))밖에 없어서, 이 하나의 산화환원쌍만으로는 흐름전지의 양극과 음극을 동시에 만들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태평양 북서부 국립연구소(PNNL) 연구팀이 2024년 Nature Communications에 발표한 이 논문은 이 문제를 배위화학으로 풀었다. 철에 씌우는 리간드(배위 화합물)를 다르게 설계하면 같은 철이라도 산화환원전위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원리를 이용해, 음극액에는 니트릴로트리메틸포스폰산(NTMPA)을 리간드로 쓴 철 착물(Fe-NTMPA2)을, 양극액에는 페로시아나이드(Fe-CN)를 써서 철 하나로 완전가용성 흐름전지를 구현했다. 1000사이클 동안 용량이 겨우 1.3%(사이클당 0.0013%) 감쇠했다.
철 이온은 다양한 리간드와 배위결합해 폭넓은 산화환원전위를 가질 수 있으며, 이는 흐름전지에서 비용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한 양·음극액을 모두 구성할 잠재력을 시사한다.
이 글은 논문 원문(Article 본문 8쪽)을 전체 통독하고 정리한 것이다. 배경 개념은 본문에 풀어 쓰고, 분석기법 설명은 글 맨 끝 부록에 모아뒀다. Battery Lab의 “ESS 상용화 수준” 미니시리즈 5편 중 마지막 편이다.
배경 — 철을 음극에도 쓰려면 리간드가 필요하다
기존 철 흐름전지(Fe-RFB)는 대부분 음극에서 철 금속을 도금·탈리(plating/stripping)시키는 방식을 쓴다. 이러면 반응(2Fe → 2Fe(II) + 2e⁻, E°=-0.44V vs SHE)의 전위는 충분히 낮아 매력적이지만, 반복되는 도금·탈리 과정에서 덴드라이트가 자랄 위험이 있고 출력과 용량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 “하이브리드형” 흐름전지가 된다.
대안은 철을 도금시키지 않고 액체 상태(가용성 착물)로만 쓰는 것인데, 문제는 철 이온이 이미 양극액(Fe(III)/Fe(II) 수화물 착물, E°=0.77V vs SHE)에도 쓰이고 있어서 “같은 원소를 양쪽에 다 쓸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여기서 핵심 통찰이 나온다. 네른스트식을 재배열하면, 리간드(Lx)와 결합한 철 착물의 산화환원전위는 다음 식을 따른다.
E°(Fe(III)·Lx/Fe(II)·Lx) = E°(Fe(III)/Fe(II)) + (RT/F)·ln[K(Fe(II)·Lx)/K(Fe(III)·Lx)]
즉 Fe(II)와 결합하는 안정도상수(K)가 Fe(III)보다 큰 리간드를 고르면 전위가 표준값(0.77V)보다 낮아지고, 반대면 높아진다. 이론적으로는 서로 다른 두 리간드로 감싼 철 착물 두 쌍만 있으면, 그 사이의 전위차가 곧 흐름전지의 출력전압이 된다. 문제는 실제로 음극에 쓸 만큼 낮은 전위를 안정적으로 내는 철 리간드를 찾는 일이 오랫동안 정체돼 있었다는 점이다. 기존에 보고된 Fe-트리에탄올아민(TEA) 착물이 몇 안 되는 후보였지만, pH 13이라는 강알칼리 조건에서만 작동해 실용성이 제한적이었다.
무엇을 다뤘나 — 포스폰산 리간드로 근중성 pH를 구현한다
연구팀이 새로 설계한 리간드는 NTMPA(니트릴로트리메틸포스폰산)다. FeCl3와 NTMPA를 1:2 몰비로 반응시켜 만든 Fe-NTMPA2 착물은 pH 8이라는 근중성 조건에서 작동한다. 근중성 pH는 산성·알칼리성 대비 수소·산소 발생 같은 부반응을 줄이는 데 유리하다.
그림 출처: Nambafu, G. S. et al., Nature Communications 15, 2566 (2024), Fig. 1, DOI: 10.1038/s41467-024-45862-3, CC BY 4.0
Fe-NTMPA2의 산화환원전위는 Ag/AgCl 기준 약 -0.30V로, 페로시아나이드(Fe-CN, SHE 기준 0.37V로 저렴하고 안정적인 양극액 후보) 대비 흐름전지 전압을 확보하기에 충분한 음극액 후보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 착물의 산화환원 신호가 유리질탄소(glassy carbon) 전극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탄소지(carbon paper) 전극에서만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 전극 표면 재질에 따라 반응성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순환전압전류법(CV)으로 확인했다.
대표 결과 — 대칭셀 100사이클, 완전지 1000사이클
먼저 Fe-NTMPA2 하나만으로 양·음극을 구성한 대칭셀(0.67M, 20mA/cm²)로 기본 안정성을 확인했다. 100사이클 동안 용량 저하나 쿨롱효율 변화가 거의 없었다 — 착물 자체가 산화·환원을 반복해도 분해되지 않는다는 예비 증거다.
그림 출처: Nambafu, G. S. et al., Nature Communications 15, 2566 (2024), Fig. 2, DOI: 10.1038/s41467-024-45862-3, CC BY 4.0
이어서 Fe-NTMPA2 음극액(0.67M)과 Fe-CN 양극액(0.67M)을 짝지은 완전지로 20mA/cm²에서 1000사이클(약 50일) 연속 시험했다. 결과는 사이클당 0.0013% 감쇠(1000사이클 누적 1.3%)로, 기존에 보고된 TEA계 철 음극액(사이클당 약 0.12% 감쇠)보다 100배 가까이 안정적이었다. 쿨롱효율은 1000사이클 내내 거의 100%를 유지했고, 에너지효율은 87%에서 80%로 완만하게 낮아졌다. 5–100mA/cm² 범위의 비대칭 전류밀도 시험에서는 충전이 방전보다 더 큰 전압 셋업(과전압)을 보였는데, 이 비대칭성이 다음 절의 구조분석으로 이어지는 실마리가 됐다.
그림 출처: Nambafu, G. S. et al., Nature Communications 15, 2566 (2024), Fig. 3, DOI: 10.1038/s41467-024-45862-3, CC BY 4.0
메커니즘 — 왜 충전이 방전보다 느린가
연구팀은 이 비대칭성의 원인을 두 갈래로 추적했다.
실시간 구조 추적: X선 흡수분광(XANES)으로 SOC(0–100%)별 철의 산화상태를 직접 정량하면, 쿨롱카운팅으로 계산한 전기화학적 SOC와 잘 일치했다. 감쇠전반사 적외선분광(ATR-FTIR)으로는 인산기(P-O) 진동 피크가 982cm⁻¹에서 1004cm⁻¹로 SOC에 따라 선형적으로(R=0.995, 0.997) 이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 이는 향후 흐름전지에 인라인 센서로 SOC를 실시간 모니터링할 잠재력을 시사한다.
그림 출처: Nambafu, G. S. et al., Nature Communications 15, 2566 (2024), Fig. 4, DOI: 10.1038/s41467-024-45862-3, CC BY 4.0
분자구조 계산: DFT(밀도범함수이론) 계산으로 Fe-NTMPA2가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배위구조(S1, S2)를 찾아냈다. S1은 각 NTMPA 리간드의 인산기 2개씩이 철과 결합하는 팔면체 배위, S2는 각 리간드의 인산기 3개 전부가 결합하는 배위다. 에너지 지형을 그려보면 방전 시(Fe(III)→Fe(II)) 리간드 재배열 없이 매끄럽게 진행되지만, 충전 시(Fe(II)→Fe(III))에는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S2 구조를 거쳐야 하는 경로(charge-2)와 큰 재배열 장벽을 넘어야 하는 경로(charge-1)가 경쟁한다. 이 리간드 재배열 장벽이 실제 셀에서 관찰된 “충전이 방전보다 느린” 비대칭 반응속도론의 분자적 원인으로 제시된다.
그림 출처: Nambafu, G. S. et al., Nature Communications 15, 2566 (2024), Fig. 5, DOI: 10.1038/s41467-024-45862-3, CC BY 4.0
상용화로 가는 길 — 저비용 원료와 고전압 변형
연구팀이 제시한 Fe-NTMPA2·Fe-CN 조합의 이론 부피용량은 약 9Ah/L, 실용 에너지밀도는 셀전압(약 0.6V) 기준 약 5Wh/L다. 이는 VRFB(통상 25Wh/L 이상)보다 한참 낮은 수준인데,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더 높은 산화환원전위를 가진 양극액도 함께 시험했다. 2,2’-비피리딘-4,4’-디카르복실산과 시아나이드 리간드로 만든 Fe-Dcbpy/CN 양극액을 Fe-NTMPA2 음극액과 짝지으면 셀전압이 약 1.0V까지 올라가고, 이론 에너지밀도도 약 9Wh/L로 향상된다. 이 고전압 조합도 100사이클 동안 안정적인 쿨롱효율을 보였다.
그림 출처: Nambafu, G. S. et al., Nature Communications 15, 2566 (2024), Fig. 6, DOI: 10.1038/s41467-024-45862-3, CC BY 4.0
비용 측면에서는 Fe-NTMPA2 합성에 쓰이는 원료(산화철, 염산, 암모니아수, 포름알데히드, 아인산)가 모두 kg당 1달러 안팎의 범용 화학원료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만 저자들 스스로 “대규모 생산의 정밀한 비용추정은 이 초기 연구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명시했다 — 원료 단가는 제시했지만, 합성 공정비용까지 포함한 실제 $/kWh 수준의 총원가 계산은 이 논문에 없다.
고찰 — 이 논문이 안 보여준 것
이 논문의 강점은 “왜 이 리간드를 골랐는가”라는 설계논리(네른스트식 기반)에서 출발해, 대칭셀 예비검증 → 완전지 1000사이클 장기시험 → 반응속도론적 비대칭의 분자수준 원인 규명까지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다만 이 논문이 다루지 않은 지점도 짚어둘 만하다. 첫째, 에너지밀도(5–9Wh/L)가 VRFB의 5분의 1 수준인데, 동일 용량을 저장하는 데 필요한 탱크 부피·설치면적이 실제로 얼마나 더 커지는지, 그 부지비용 증가가 원료비 절감을 상쇄하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둘째, “비용 효율적”이라는 논문의 핵심 주장이 원료 단가 수준에서만 뒷받침되고, 실제 합성 공정비용을 포함한 총원가 계산이 없다. 셋째, 1000사이클(50일)은 유의미한 장기데이터지만 ESS 상용 요구수명(수천–수만 사이클 상당)에는 못 미치며, 에너지효율이 계속 완만히 하락하는 추세가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다. 넷째, 고전압 Fe-Dcbpy/CN 조합은 100사이클만 시험됐고, 1000사이클급 장기데이터는 기본 Fe-CN 조합에만 있다.
My Take
이 논문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원소는 하나, 리간드는 둘”이라는 설계 자유도다. 새로운 원소를 발굴하는 대신, 이미 잘 알려진 철에 서로 다른 배위환경을 씌워 흐름전지 특유의 자원 제약(양쪽 전극에 필요한 서로 다른 활물질)을 우회했다. 이 접근은 철뿐 아니라 다른 저렴한 전이금속(망간, 구리 등)에도 원리적으로 적용 가능한 설계철학처럼 보인다.
이번 배치로 다룬 5편을 돌아보면, 상용화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레버는 신소재 자체가 아니라 공정·운전조건·시스템 실증이었다는 것이 공통된 패턴이었다. 이 논문은 그 패턴에서 유일하게 “새 리간드”라는 진짜 신소재를 내세우면서도, 정작 강조점은 “화학적 참신함”이 아니라 “합성이 단순하고 원료가 싸다”는 공정·비용의 언어였다. 결국 이 시리즈 5편 모두가 —소재든 공정이든— 결국 같은 질문으로 수렴한다. 실험실 성능이 아니라 실제로 만들고, 굴리고, 값을 매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Battery Lab 시리즈는 이 편으로 ESS 상용화 미니시리즈 5편을 마무리한다. vault에 원문 PDF가 확보된 논문은 계속 순차적으로 리뷰할 예정이다.
부록 — 이 글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지식과 용어
1. 철 흐름전지의 핵심 개념
- 배위화합물(리간드, ligand): 금속 이온에 전자쌍을 제공하며 결합하는 분자나 이온. 같은 금속이라도 어떤 리간드가 둘러싸는지에 따라 그 금속의 화학적 성질(산화환원전위 포함)이 크게 달라진다.
- 안정도상수(K, stability/formation constant): 금속 이온과 리간드가 결합해 착물을 형성하는 반응이 얼마나 잘 일어나는지(평형이 얼마나 착물 쪽으로 치우쳐 있는지)를 나타내는 값. 이 논문의 핵심 설계논리(네른스트식)에서, Fe(II)와 Fe(III) 각각의 안정도상수 차이가 산화환원전위의 이동방향을 결정한다.
- 완전가용성(all-soluble) 흐름전지: 양극·음극 모두 고체 도금·탈리 없이 액체 상태의 활물질만으로 작동하는 흐름전지. 도금형(하이브리드형) 대비 덴드라이트 위험이 없고 출력과 용량을 독립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
2. 이 논문에 새로 쓰인 분석기법
- X선 흡수 근접구조분광(XANES, X-ray absorption near edge structure): 특정 원소(이 논문에서는 Fe)의 흡수단(K-edge) 부근 X선 흡수 스펙트럼을 분석해, 그 원소의 산화상태와 국소 배위환경을 직접 알아내는 기법. 이 논문에서는 소형 실험실용 XAS 장비(bench-top easyXAFS)로 SOC별 철의 산화상태를 정량했다.
- 선형조합분석(LCA, linear combination analysis): 미지의 스펙트럼을 이미 알려진 표준 스펙트럼(순수 Fe(II), 순수 Fe(III) 등) 몇 개의 가중합으로 피팅해, 그 미지 시료 안에 각 표준 성분이 몇 퍼센트씩 섞여 있는지 정량하는 방법. XANES 스펙트럼으로부터 SOC를 산출하는 데 썼다.
- 감쇠전반사 적외선분광(ATR-FTIR): 시료 표면 바로 위 매우 얇은 층의 적외선 흡수 스펙트럼을 측정하는 기법. 용액 상태의 전해질이라도 표면 근처 분자구조 변화를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어, 이 논문에서는 SOC에 따른 인산기 진동 피크의 이동을 관찰하는 데 썼다.
- 밀도범함수이론(DFT, density functional theory): 전자의 밀도분포를 기반으로 분자·결정의 전자구조와 에너지를 양자역학적으로 계산하는 방법. 이 논문에서는 Fe-NTMPA2 착물이 가질 수 있는 여러 배위구조의 안정성(자유에너지)을 비교하는 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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